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서 개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너무나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믿음'에는 '급한 것'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간난아기가 예배 시간에 기저귀에 대변을 누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배가 중요합니까? 대변 치우는 것이 중요합니까?
하지만, 아무리 예배가 중요해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변 치우는 일을 우선 해야 합니다.
대변 치우는 것은 '급한 일', 예배는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구덩이에 빠진 소를 예로 들며 이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예로, 예수님을 모르는 한 불쌍한 소경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에게 급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급한 것은 눈을 뜨는 일이고, 중요한 일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환자들의 병을 고칠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급한 문제지만, 예수님은 항상 중요한 것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은 '급한 것'이지만, 구원은 '중요한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도 마르다는 급한 일을, 마리아는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급한 일은 급한 일이고, 중요한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절대로 이것이 뒤섞이면 안됩니다.
급한 일을 중요한 일로 착각하면, 신앙의 편의주의가 되기 십상이고, 반대의 경우는 율법주의에 빠지 쉽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병고침, 기적, 축복, 예언 등등 이런 '급한 것'들을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교회를 보면, '중요한 것'보다 '급한 것'을
추구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흔히 잘못된 교회, 이단 교회는 표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선명성을 부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특히 좋아하는 말씀, 히브리서 2장 4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하지만, 표적에 대한 다른 예를 들면, 마태복음 16장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마태복음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분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절대 기억해야 하는 것, 우리는 기적도 예언도 체험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하나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이후에 도마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눈에 보이는 증거도 필요합니다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삼층천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절 서두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무익하나마"
모세의 경우처럼, 기드온의 경우처럼, 표적도 필요합니다만, 우리는 표적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표적을 쫓는자는 아직 믿음이 없거나 어린아이 믿음입니다.하나님은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아닌 '표적'으로 '진정성'을 가리는 것은 미련 곰탱이나 하는 짓입니다.
말씀을 벗어나 기적과 예언과 같은 '표적'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이단의 수법입니다.
행위 구원을 강조하는 자는 구원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주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곧 열조의 언약과 율법의 언약입니다.
열조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온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언약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복이요 범하면 저주입니다.
이 저주는 또한 열조의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열국에 흩어지는 것이 포함됩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율법을 범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니 율법을 행하여 복을 받은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구원은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의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지키면 복이요 범하면 저주인 상벌의 율법과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속죄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 상벌의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는 속죄의 율법은 곧 동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는 것입니다.
곧 동물 제사와 믿음은 동격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믿음에 의하는가 행함에 의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곧 상벌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의하여 구원되듯 행함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입니다.너무 쉬워서 믿지 못하겠다면 그로인해 믿음 없는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복과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이 믿음에 의하느냐 행함에 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벗어난 상태이지 율법을 행하여 받는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복을 받으려면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의 문제는 마태복음 5-7장에 등장합니다. 이 복에 대한 것은 구원에 대한 것과 다르게 모두 행함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에 감사하여서 행하며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구원은 믿음에 의하나 복은 행함에 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으나 행함에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구원 받은 자를 과거와 같이 죄악 속에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십니다.
곧 행함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이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하는 것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행할 수 없으니 천국에 갈 수 없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합니다.
이상과 같이 죄사함이 제사에 의한다는 것을 안다면 구원은 믿음에 의하나 복은 행함이 따라야 하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 복된 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천국에 이르는 것이지 죄사함 받았다고 행함이 없어도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리세인보다 의롭기를 예수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복과 저주, 복과 구원을 구별해야 하며 제사와 햄함 곧 믿음과 행함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
복음을 깨닦지 못한 행함을 강조하는 분들은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다 못들어 간다고 합니다. 그말은 맞습니다.그러나 그말에 속지마십시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자가 들어가라라 말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자는 삯을 받는 일꾼입니다. 다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 곧 아들들만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아들입니다.아들이 지옥가기를 원하는 아버지 보셨나요?
주여 주여하는 자는 아들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라고 하는 자가 아들입니다.
구원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버지방법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이것이 선물입니다.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멘! 아니요! 지금 결정 할 때입니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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